바야흐로 2학기가 찾아왔다. 대학생의 여름방학이라는 것은 전국의 초,중,고등학생들의 방학기간에 비해서야 거의 두배 가까이 차이 날 정도로 길어 보였지만, 사실 알바다 자격증 준비다 해서 정신 없이 보내고 나면 막상 정신 차렸을 때는 개강날이 코 앞에 다가오는 것이다. 방학이 지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 방학동안 흐지부지 보냈다는 자괴감 때문인지, 아니면 다시 한 학기동안 박터지게 수업과 과제에 시달릴 미래에 대한 암울함 때문인지 대부분의 학생은 새학기 증후군을 겪으며 개강 첫 주동안은 학교 분위기에 다시 적응하느라 많은 정신력을 소모해야 했는데 태일은 남들보다 유독 그 정도가 심했다.
사실 작년에 편입하자마자 한 학기만에 휴학계를 내고 일 년만에 복귀한 태일에게 이 학교가 어색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 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기 쎄보이는 외모에서는 유추할 수 없는, 그의 무척이나 소심한 성격은 학교 적응을 더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경훈이 이 학교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태일은 완벽한 아싸인 채로 학교를 다녔을 지도 모른다. 지금도 굳이 말하면 학교에 친구라곤 경훈 밖에 없는 아싸이긴 했지만.
"예서야아-. 방학동안 뭐하고 지냈어?"
"프사보니까 어디 해외라도 갔다 온 거 같던데! 나도 같이 좀 데려가지!"
전공수업이어서 그런지 강의실의 분위기는 꽤 왁자지껄했는데 대부분의 목소리는 뒷자리의 여자들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 남학생 주변을 둥글게 감싼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끼리끼리 모여 잡담하는 것은 어느 강의실에서나 흔히들 있는 일이었지만 여학생들이 한 남학생을 에둘러 싸고 있는 이 순정만화 같은 광경은 낯선 것이었기에 태일도 눈길이 가지 않을래야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별 다른 데 간 건 아니었고 그냥 형들이랑 프랑스 갔다 왔어."
"예서 너 형도 있어?"
"응. 셋 있어! 다들 좋은 형들이야."
여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기에 남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태일은 여자들의 물음에 일일히 대답하는 목소리가 남자치곤 꽤나 높은 톤의 미성이라고 생각했다. 목소리부터 상냥함과 다정함이 잔뜩 묻어 있어 여자들이 왜 저 남학생에게 저리도 관심을 주는 지 알 듯도 싶었다. 사람들 특히나 더더욱 여자와는 제대로 된 대화도 한마디 못 나누는 태일으로선 부러운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내 교수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뒷자리에 모여있던 여학생들도 교수의 등장에 다들 느릿느릿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태일은 수업이 시작되자 제 옆자리에서 책상과 혼연일치가 되어 엎드려 누워있는 경훈을 흔들어 깨웠다. 어제도 야간 아르바이트가 있던 것인지 경훈이 눈곱 낀 졸린 눈을 비비며 허리를 세웠다. 아무리 개강 첫 주라 지만 가방은 물론 볼펜 한자루 조차 들고 오지 않은 경훈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태일을 팔꿈치로 툭툭 쳤다.
"태일아 펜 하나만."
"펜 빌려주면 필기는 어디다 하게."
"음. 그럼 공책도 한 장만."
"한 장당 오만원이다."
"에이 줄거면서 튕기긴."
"에휴..."
태일은 낮게 한숨 쉬며 필통에서 검정 펜 한 자루와 공책 한 장을 찣어 경훈에게 건냈다. 땡큐. 경훈이 작게 속삭였다. 그 때 교수가 꽤 달갑지 않은 말을 했다.
"여러분 개강 첫 주 부터 조 짜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중간고사는 금방이니까, 빨리 짜버리는 게 낫겠죠? 다들 3인 1조로 팀 짜서 명단에 이름 써서 제출하세요. 오늘 수업은 조만 짜고 끝내도록 하죠."
작년 1학기에 이 교수님의 강의를 몇 개 들어 본 적 있던 태일은 이 교수님의 수업 특성상 학기 초부터 팀을 짜야 한다는 것은 대충 인지하고 있었지만 역시 주변을 둘러 보고 둘러 보아도 대부분은 다 1학년들 뿐이어서 태일은 팀을 짤 생각에 머리가 지끈해 졌다. 그나마 사교성 좋은 경훈이 있기에 망정이지…. 태일은 구원자를 바라보는 눈길로 경훈을 바라 보았다.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금방이라도 졸 것 같은 눈이었지만 교수의 이야기는 제대로 듣긴 한 건지 팀원을 구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물색했다.
"예서는 나랑 할 거 거든?"
"웃기시네. 예서야 나랑 하자! 나 저번 학기 차석 했잖아."
"야 예서는 과탑이거든?"
또 뒷자리가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태일이 몸을 돌려 뒤를 살짝 바라보니 역시나 아까의 그 여학생들이 아까 그 자리를 중심으로 둥글게 서서 이번엔 서로 잡아 먹을 듯 으르렁 대고 있었다. 태일은 이번엔 남학생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는 데 의자에 앉아 저 때문에 벌어진 이 상황을 곤란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잘생긴 놈이길래 여자애들이 저렇게 목매는 건가 싶었는데, 남자의 얼굴을 보자 마자 태일은 여학생들의 행동들이 괜시리 납득이 가서 머리가 절로 끄덕여졌다. 사실 잘생겼다기보단 예쁘다에 가까운 얼굴이었는데 뉘 집 아들내미인지는 몰라도 부모님이 참 자랑스러우시겠다 싶었다.
"그럼 가위바위보로 정해!"
"좋아. 삼세판."
급기야 가위바위보결투로 까지 번진 여자들의 무서운 집념은 꽤나 재밌는 볼거리였는데 교수도 이런 상황이 이젠 익숙해 진 것인지 허허 웃으며 귀엽다는 눈으로 학생들을 바라 보고 있었다. 이미 남학생들은 삼삼오오 다 조를 짠 상태여서 아는 얼굴이 없나 강의실을 스캔하던 경훈은 예서를 두고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이 강의실의 분위기도 읽지 못하고 일순간 예서를 향해 소리쳤다.
"어? 야! 예서야! 너 조 없지? 형들이랑 같이 조 짜자!"
모든 시선이 경훈에게 날아와 꽂혔다. 특히나 여자들의 눈초리가 흉흉했다. 차마 선배라서 대놓고 욕할 순 없지만 경훈을 향한 여학생들의 눈빛 하나에 태일은 온갖 욕이 다 들리는 것 같은 환청에 시달렸다. 경훈을 향한 원망섞인 시선에 괜히 옆자리에 있던 태일인 제가 죄인이라도 되는 냥 몸이 뻣뻣히 굳었다. 하지만 올림픽에 뻔뻔함이라는 종목이 개설 된다면 분명 금메달은 따놓은 당상일 경훈은 개의치 않고 예서를 손짓으로 불렀다. 예서가 종종걸음으로 경훈에게 다가와 웃었다.
"아. 네! 좋아요 형. 근데 3인 1조라 한 명 더.. "
언제 경훈이 이 잘생긴 학생과 이렇게 친분을 쌓은 걸까 태일이 궁금해하고 있는 사이 경훈은 태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씨익 웃었다.
"내 친구 박태일이야. 생긴건 좀 싸납게 생겼어도 엄청 소심하고 여린 애니까 너무 겁 먹지 말아라?"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는 문예서라고 해요. 아직 일학년이라 팀에 민폐만 끼칠 지도 모르지만 잘 부탁드려요!"
금방이라도 얼굴에서 과즙이 톡! 튈 것 처럼 상큼하게 웃으며 예서가 태일에게 인사했다.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른 태일은 예서의 인사에 작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선 기분 나빠질 수도 있는 태일의 행동이었지만 예서는 딱히 큰 상관을 하지 않는 듯 씨익 웃곤 재빨리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제 핸드폰을 찾아 태일 쪽으로 건넸다.
"번호 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경훈형 번호는 있는 데 선배님 번호는 없어서요."
"어, 응."
예서의 핸드폰을 받아 드는 태일의 손의 미세하게 떨렸다. 오랜만에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려니 이마엔 식은땀마저 났다. 키패드를 누르는 손가락이 몇 번인가 미끄러지고 나서야 겨우 태일은 제 번호를 정확하게 입력했다. 다시 핸드폰을 받아 든 예서가감사하다며 생글생글 웃곤 제 자리로 돌아갔다. 왜 자기들이랑 조를 짜지 않았냐는 여학생들의 한숨 섞인 원성이 예서에게 빗발쳤다. 경훈은 예서가 있는 쪽을 턱 짓하며 태일에게 나즈막히 말했다.
"진짜 애가 참 괜찮아. 잘생겼지 공부도 잘하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집도 잘 사나 보더라."
"성격 좋아보이더라."
"박태일. 너는 좀 그 놈의 소심함 좀 고쳐라. 예서가 애가 착해서 그러지 요새 후배들한테 그렇게 굴면 뒷말 돌아요."
"어차피 돌고 있을텐데 뭐."
"하여튼 박태일. 이 기회에 나 말고 다른 애들이랑 좀 친해지고 그래봐라."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였으면 진작에 나도 이러고 안 살지…."
"쯧쯧. 여하튼 우리 태일이 이 형 없으면 어떻게 학교생활 했으려나."
"니가 왜 형이냐?"
"내가 생일 한 달 더 빠르니까."
태일이 사람 하나 죽일 것 마냥 흉흉하게 경훈을 노려 보았다. 하지만 원래 태일의 눈매가 사납기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그냥 삐진 티를 내는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는 경훈은 역시 태일은 놀리는 맛이 좋다고 생각하며 킬킬 웃었다. 경훈은 태일을 처음 봤던 고1 무렵을 다시금 상기 하며 저 사나운 눈매를 이유 없이 두려워 했던 때를 떠올렸다.
한창 새학기의 간질간질한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있는 고등학교의 1학년 교실. 중학교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서만 생판 모르는 아이들과 같은 반이 된 경훈은 제 중학교 친구들 대거 배정된 옆 반을 찾아와 우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사실 혼자만 다른 반에 배정되었다는 사실이 문제인 건 아니었다. 경훈의 특출난 사교성으로는 친구 사귀는 것 쯤이야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이미 새로운 반에 잘 적응해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 둔 상태였지만 경훈이 이렇게 절망하고 있는 것은 오늘 바꾼 자리배치 결과 때문이었다.
"왜 하필이면 박태일 옆인 건데에.."
박태일. 아마 이 일대 중학교를 나왔더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알음알음 들어 봤을 이름이었다. 특히나 누가 학교짱이고 잘나가는 애인지에 대해 민감한 남자애들이라면 더더욱. 경훈은 태일을 만나기 전까진 중학생 주제에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몇대 일로 이겼다느니 여자는 물 마시듯 갈아 치운 다느니등의 소문같은 건 콧방귀 끼며 믿지 않고 있었만 태일의 옆자리에서 그를 실제로 본 경훈은 그 잘생긴 얼굴과 그 잘생긴 얼굴 마저 덮어 버리는 사나운 분위기에 기가 죽어 처음으로 그를 둘러싼 어마무시한 소문들이 사실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힘내라. 김경훈. 니 업보라고 생각해."
"김경훈 화이팅!"
친구들로서는 드물게 진심을 담아 경훈을 위로했지만 그 어떤 위로도 경훈의 귀에 제대로 와닿질 않았다. 하느님 부처님.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게다가 이 자리는 한 학기 내내 갈 거라고 하니 경훈은 꼼짝 없이 그 야수같은 놈이랑 반 년을 짝으로 지내야 하는 셈이었다. 박태일에게 잘못 걸리면 전치 4주는 일도 아니라던데. 경훈은 훌쩍거리며 병원에 실려가는 제 미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러던 중 다시 수업 시작이 알리는 종이 심란한 경훈의 마음과는 반대되게 경쾌한 음으로 교내를 울렸다.
"으아아악! 가기 싫어!"
경훈은 머리채를 쥐어 뜯으며 발작했다. 그 광경을 굉장히 안타깝게 바라보던 경훈의 친구들 중 하나가 책상 밑에 몰래 숨겨두었던, 캐릭터 스티커가 든 초코빵을 하나 꺼내 경훈에게 건내며 어깨를 토닥였다.
"불쌍한 김경훈. 내 친히 불쌍한 네 녀석을 위해 소중한 양식 하나를 내주겠노라."
빵 하나를 들고 터덜터덜 기운 없이 교실로 돌아와 태일의 옆자리에 쭈뼛쭈뼛 앉은 별 다른 말 없이 창밖만 하염없이 응시하는 태일의 옆모습을 흘깃 바라보며 나즈막히 한 숨을 쉬었다. 한학기 동안 목숨 보존 잘하자 김경훈. 스스로에게 화이팅을 불어넣으며 경훈은 태일 옆에선 눈에 띄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지루한 국어 수업시간. 방금 전 쉬는 시간에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늘어 놓느라 기력이 딸려 슬슬 배가 고파진 경훈은 조심스레 빵 봉지를 깠다. 그리곤 습관처럼 빵 봉지 안에 있는 스티커부터 먼저 빼내 껍질을 깠다. 귀여운 하얀색 곰 캐릭터가 방긋 웃으며 안에서 나타났다. 아 뭐야. 있는거네. 경훈은 관심 없다는 듯 책상 서랍에 스티커를 대충 쑤셔박곤 빵을 한 입 베어 물다가 왠지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헙! 경훈은 태일의 살기등등한 눈빛과 마주 치곤 하마터면 수업 도중에 크게 소리 지를 뻔 했다. 다행히 그 사태만은 피했지만 경훈은 자신의 책상 서랍을 흉흉히 노려보고 있는 태일을 보며 당장에라도 울고 싶어졌다. 내가 뭐 잘못 한걸까? 수업시간에 빵 먹어서 거슬렸나? 아 왜 수업시간에 빵을 까가지곤! 나란 새끼 정녕 이렇게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 못 해보고 병원에서 평생을 살게 되는 것일까!
별별 생각을 하며 경훈이 파들파들 떨고 있을 때, 태일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듯 작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태일은 입을 굳게 다물곤 고개를 다시 창가 쪽으로 훽하니 돌려버렸다. 태일이 자신을 노려 봤던 그 몇 초의 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던 경훈은 태일이 고개를 돌리자 안심한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지만 너무 크게 숨을 내쉬었던 것일까. 이내 더 흉흉해진 얼굴로 태일이 경훈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경훈은 당장에라도 제 입을 바늘로 꼬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지고 난 후였다. 경훈은 다시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제 미래를 상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저…,"
수차례 옴싹달싹하던 태일의 입술이 드디어 목적을 말하려는 듯 작게 벌어졌다. 얘는 목소리도 무섭냐. 보통 남자애들보다도 한참은 낮은 태일의 음성이 경훈의 몸을 굳게 했다. 곧 이어 나한테 한 번 죽어볼래? 라던가 병원에 실려가게 해줄까? 라는 등의 말이 태일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 경훈은 예상했다. 하지만 경훈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스티커, 버릴 거면 나...주면 안될까?"
수업시간임을 인지해 작게 소곤거리는 톤으로 태일이 경훈에게 말했다. 경훈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장기를 떼가겠다고 한 건가? 방금 뭔가 엄청난 걸 들은 거 같은데. 경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하며 무례하다는 것도 잊고 태일을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지금 천하의 박태일이 나한테 곰돌이 스티커를 달라고 말걸었다..고? 경훈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경훈의 무례한 시선에 귀까지 얼굴이 빨개진 태일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얼른 경훈에게 사과했다.
"…쓸거면 안 줘도 돼... 부담스럽게 했다면 미안..."
"아..아니 그건 아닌데...주...줄게!"
당황한 경훈이 분주한 손길로 소란스럽게 책상 밑을 뒤져 좀 전에 아무렇게나 쑤셔 두었던 스티커를 찾아 태일에게로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태일은 수줍게 고맙다고 볼을 붉히며 제 책상 밑에서 귀여운 캐릭터 스티커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클리어파일을 꺼내 조심스레 새로 수집한 스티커를 떼어다 거기에 붙였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이 꽤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 듯 보였다.
"저.. 그거 모으는 거야?"
경훈이 겁도 없이 태일에게 말을 걸었다. 태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훈에게 답했다.
"응. 이 캐릭터 좋아하거든..."
하하.. 경훈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순해 빠진 놈에게 지레 겁먹어 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괜히 더 크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소바닥으로 태일의 등을 두드렸다.
"너랑 친해질 수 있을 거 같다! 난 김경훈이야. 잘 부탁해!"
"나...난 박태일인데."
"니 이름 모르는 애는 아마 전교에 없을걸?"
경훈은 껄껄 웃으며 태일에게 말했다. 태일은 곤란한 듯 얼굴을 구겼다. 언뜻 보기엔 화가 났다고 생각될 수 도 있는 표정이었지만 태일과 친구가 된 지금은, 딱히 태일이 화가 나서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님을 경훈을 알 수 있었다. 원래부터 그냥 사납게 생긴 것일 뿐이다 얘는.
"거기 뒤에 남학생. 수업 중에는 떠들지 말아라."
이내 국어선생의 날카로운 지적이 경훈에게 날아들었다. 경훈은 생글생글 웃으며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내 수업은 계속 되었지만 경훈은 왠지 남들이 모르는 엄청난 비밀을 자기 혼자만 알게 된 것 같아 수업 내용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후에 경훈과 태일이 친해진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